2016년 5월 31일 화요일

프란츠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등록



프란츠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프란츠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 미리보기를 참고 바랍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사람들은 왜 가정을 안식처라고 할까요? 그것은 가정에서만큼은 누구든 자신의 ‘어떠어떠함(즉 외모나 성격, 재능 또는 재산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에 관계없이 그의 ‘있음’ 그 자체로써 인정받고 사랑받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영혼, 곧 우리가 오늘날 그저 마음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쉴 수 있다는 거지요. 이러한 쉼, 이러한 편안함이 안식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가족이란 그 누구도 상대의 ‘어떠어떠함’ 때문에 사랑하거나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 가정은 결코 안식처가 아니고, 심지어 가정이라고 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런데도 종종 그런 가정들이 있어서 그 때문에 일어나는 비극을 보여주는 문학작품도 적지 않습니다. 그중 하나로 체코 출신의 천재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가 쓴 『변신』을 들 수 있습니다.

직물회사 외판원인 주인공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한 마리 흉측한 곤충으로 변합니다. 갑옷처럼 딱딱한 등과 아치형으로 부풀어 오른 갈색의 배, 그리고 불안스럽게 꿈틀거리고 있는 수많은 다리를 가진, 아마도 거대한 바퀴벌레쯤 되는 곤충으로 변신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를 발견한 가족들은 놀라고 슬퍼하며, 한 편으로는 절망하게 되지요. 그것은 가족들이 그레고르를 사랑해서뿐만 아니라, 5년 전 아버지가 갑자기 파산한 이후 그가 가족의 생계는 물론이고 빚까지도 떠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처음에는 감동적인 가족애를 발휘하여 그 흉측한 곤충을 참아내고, 돌보며, 안락하게 해주고, 그의 인간적인 것을 다시 불러내려고 노력도 하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슬픔과 사랑은 사라지고 귀찮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저것 때문에 못살겠으니 없앨 계획을 세워야 한다’라고 외치기에 이릅니다. 이유인즉 그레고르가 더 이상 돈을 벌어 생계를 책임지던 예전의 든든한 아들이자 오빠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한마디로 그의 ‘어떠어떠함’이 완전히 변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의 사랑도 따라 변한 거지요. 결국 그레고르는 가족들의 냉대와 폭력, 증오 속에서 고독하게 죽습니다. 아니 오히려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해야겠지요. 흉측한 외모에다가 돈까지 벌지 못하는 인간이 현실세계에 발붙일 곳은 어디에도 없었던 거지요. 그에게는 가정이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레고르는 새벽 3시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에서 감동과 애정을 간직한 채 집안 식구들을 생각하며 숨을 거둡니다. 그러자 가족들은 그의 주검 앞에서 신께 감사를 드리고 악몽 같았던 지난 몇 달의 고통을 씻어버리기 위해 교외로 소풍을 가지요. 그들끼리 그리고 훈훈한 가족애를 확인하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가 가족을 그의 ‘어떠어떠함’을 기준으로 평가하고 사랑한다면, 그 ‘어떠어떠함’이 변했을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소설 『변신』은 흉측한 곤충으로서의 변신이라는 대담하고도 기발한 장치를 이용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는 거지요. 변신으로 인하여 그레고르는 가족을 먹여 살리던 부양자(扶養者)에서 오히려 가족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착취자, 벌레로 표현되는 원형적인 기생자(寄生者)로 탈바꿈했습니다. 거대한 벌레라는 모습 자체가 기생생활에 대한 상징이며 과시인 거지요. 그러자 가족에게마저 “옆방의 물건은 치워야 한다”는 식의 냉대를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무서운 진실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다운 가족 간의 사랑조차 경제적인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카프카의 통찰입니다. 그래서 설사 가족이라고 해도 경제적 관계, 곧 그의 ‘어떠어떠함’이 변했을 경우 그에 대한 사랑도 따라서 변한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가족 간에 그럴 수 있냐고요? 아마도 소설이니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느냐고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신문에 보면, 우리 주변에서는 이보다 더한 일들도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보험금을 타려고 아내나 남편을 살해하는 사람들, 심지어 어린 자식을 버리는 부모들이나, 늙고 병든 부모를 내다 버리는 자식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옆방의 물건은 치워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물론 나름대로 사정이야 있겠지만, 어쨌든 이러한 일들은 가족의 ‘있음’ 그 자체를 사랑해야만 하는 가정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또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들이지요.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시죠!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인간본성이 원래부터 악해서일까요? 아니면 오늘날에 와서 가족 간의 사랑이 그만큼 줄어든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인간소외의 문제와 만나게 됩니다.

인간소외란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 일을 말하지요. 그런데 카프카의『변신』이 상징하고 있는 현대인의 인간소외는 자본주의의 본질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레고르의 가족들의 태도가 돌변한 것, 어린 자식이나 늙은 부모를 내다 버리는 것에도 알고 보면 모든 가치를 오직 하나의 가치, 곧 경제적 가치로 바꾸어 계산하게 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문제가 깔려 있다는 말이지요. 자본주의의 본질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개인의 이기심과 체계적 이윤 추구의 정당화’입니다. 인류 역사를 두고 자본주의 사회, 특히 그것이 전 지구화(globalization)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를 제외하면 개인의 이기심과 이윤추구가 이처럼 정당하게 인정받은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든 이기심은 지탄의 대상이었고,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돈을 세었지요. 그런데 이들을 밝은 빛으로 끌어내어, 그 몸에 홍포를 입히고 그 머리에 황금관을 씌워준 것이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이에 대한 뛰어난 성찰을 담고 있는 저서가 독일의 유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의 『프로테스탄스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지요. 이 작품에서 베버는 자본주의 사회가 그 초기부터 어떤 식으로 이윤 추구를 정당화하기 시작했는가를 미국의 정치가이자 과학자였던 벤저민 플랭클린(B. Franklin, 1706-1790)의 다음과 같은



자료출처 : http://www.ALLReport.co.kr/search/detail.asp?pk=11012824&sid=ddangkung&key=



[문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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